중세 기사의 갑옷과 무기
서장: 기사의 기원
중세 기사는 일반적으로 온몸을 무장하고, 기사도의 계율에 묶인 승마한 전사로 알
려진다. 기사와 말의 긴밀한 관계는 유럽 전체에 알려진 그의 명칭에 의해 명백히
보여진다; 그는 프랑스어로 쉬발리에(chevalier), 이탈리아어로 까발리에르(cavalie
re), 스페인어로 까발레로(cabalero), 독어로는 타다는 뜻의 단어에서 온 리터(ritt
er)이다. 심지어 기사들이 나중에 추종하게된 계율의 이름인 기사도(chivalry) 조차
도 프랑스어 쉬발(cheval)에서 유래되었다. '기사'라는 단어가 말과 직접적인 관계
를 가지지 않는 곳은 영국 뿐이다. 그것은 앵글로색슨 단어 chiht에서 왔는데, 가신
이나 하인이라는 뜻이며, 12세기가 되어서야 기사 지위와 기사도는 고귀한 태생과
뗄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최초의 문명 시대부터 승마한 전사는, 전차였든 말잔등이었든 간에, 우월한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말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회에 대한 승마인의 효과는 너무나
대단해서, 고대 그리스의 켄타우르스같은 전설적인 피조물을 연상케 하는 이유가
되었다. 군마를 유지, 양육하고 훈련하는 비용 자체가 대부분의 승마 전사들이 사회
의 최상층에서 배출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강대한 지중해 문명의 군사 체계는, 특
히 그리스와 로마의 그것은 주로 보병을 기반으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와 로
마 양쪽의 고전적인 문명에서 기병(hippeus)과 기승병(equites)은 최고 귀족들과 일
반적인 시민들 사이의 구분되는 사회 계급을 형성했다.
로마 군대의 발달사는 일종의 적응과 혁신이며, 그것이 마주치게 된 거의 모든 군사
체계의 일면들을 받아들였다. BC 2세기의 그리스 역사가인 폴리비우스에 따르면,
로마인들은 장갑 기병의 장비와 전술적 배치를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로부터 받아
들이면서, 투창을 장창으로 대치했다. AD 4세기에 이르러 로마 군대는 카타프락타리
(cataphractarii)라고 알려진, 갑주를 걸친 말에 타는 중장기병을 개발했다. 이들
비싸고 정예화된 부대는 5세기와 6세기의 서로마제국 붕괴에서 살아남지 못했지만,
이때까지 그들은 그들의 적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대개 서로마제국의 게르만 침
략자들은 갑옷 없이 보병으로 싸웠다; 전통적으로 각 통치자는 보통 약 300명 가량
의, 혈연과 명예와 보수로 묶인 일단의 선발된 병사에 의해 둘러싸였다. 부하들은
죽음을 넘어서까지 충성을 바쳤다 - 만일 그들의 추장이 전투에서 살해되면, 그들의
의무는 복수하거나 혹은 그러한 시도를 하다 죽는 것이었다. 이런 사상은 다른것
들과 함께 서사시 베오울프(Beowulf)에 묘사되어있다. 기사는 이 두 전통을 접합함
으로써 창출되었다.
AD 7세기에 서유럽에서 전투에 말을 중점적으로 사용한 유일한 민족은 롬바르드족이
었다. 이 민족은 동유럽을 휩쓸고 거기서부터 이탈리아로 들어가서 롬바르디 왕국을
수립했다. 그들은 극도로 위험한 적이라는 것을 입증하였는데, 이것은 동시대의 비
잔틴 역사가들에 의해 상세히 증언되었다. 733년 포이티에에서 사라센을 그렇게 결
정적으로 패퇴시킨 샤를 대제의 프랑크 군대는 거의 완전히 갑주 부대의 정예병을
근간으로 한 보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포이티에에서 조금 후에 프랑크족
은 대량의 기병을 양성하기 시작하고 그들을 징집하고 장비하기 위한 법이 제정되었
다. 그들의 장비를 구입하고 유지하기 위해 심지어 교회에서도 땅이 징발되었다. 샤
를마뉴는 774년에 롬바르디를 정복하고 대량의 롬바르드인을 그의 군대로 징집하여
8세기에는 장갑 기병 정예가 사회적 군사적 양쪽의 의미에서 창출되었다. 이 새로운
부대를 유지하기 위해 샤를마뉴는 모든 신민들이 어떤 형태로든 군역을 져야 하는
법을 반포했지만, 전체적으로 징병하는 대신에 네 사람이 다른 한명의 장비를 조달
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모든 자유인에게 부과되는 전쟁 세금에 의해 유지되었다. 그
가 신성 로마 황제로 선출된 후에, 이것은 그의 왕국 전체에 퍼진 법이 되었다.
최초로 기사 작위를 부여받은 자들은 샤를마뉴 궁정의 팰러딘들로서, 라틴어로 에쿠
에스(eques) 작위를 받았다. 이들은 프랑크 왕국에서 황제를 섬겼던 갑옷입은 기수
였다. 샤를마뉴의 후계자들 치하에 황제의 중앙집권은 미약해지고, 제국의 외각 진
지 방어는 점점 더 제국 제후들과 그들의 요새, 그들의 말을 탄 가신들의 손으로 떨
어졌다. 이들 가신들은 분규와 전쟁에서 그들의 주군을 지지하는 댓가로 영지를 받
았고, 이것으로부터 장원 제도가 발생하게 되었다. 첫번째 기사도 시와 이야기는 이
들 가신들의 삶을 둘러싸고 짜여졌다; 롤랑의 노래와 아써왕과 원탁의 기사에 대한
이야기는 유사한 기원을 갖고있다. 13세기에 이르러서 기사도 전통은 기사들에게 그
의 말 만큼이나 중요한 일부가 되었다. 전투에서 피를 흘리는 것과 명예와 주군에
대한 충성, 그리고 나중에는, 그리스도 교리가, 그들의 초석이 되었다. 그러나, 그
개념은 AD 1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게르만 종족 생활의 일부였고, 켈트족과 다른
유럽 부족 전통에서 고위 전사 계층은 그들의 보호를 받는 농민에 의해 지탱되었었
다. 다시말하면, 기사의 전통은, 그 장비와 갑옷의 형태와 함께, 후기 고대의 그것
을 그대로 계승하지 않았다면 적어도 영향을 받았는데, 이것들 자체는 켈트족에게
강한 영향을 받았다.
최초의 기사인 팰러딘들은 기본적으로 후기 로마 갑옷의 조잡한 변형을 장비했다.
대부분의 경우 그들은 몇개의 조각으로 구성된 둥글거나 원뿔형 철모(helmet)을 썼
는데, 이것에는 현대 용어로 고리쇠투구(Spangenhelm)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것들은
4세기와 5세기 동안에 제국 무기 공장에서 생산된 후기 로마 철모의 직계 후손이다
. 이들 공장과 그 직공들의 대부분이 이주해온 게르만 부족의 손에 떨어졌기 때문에
, 이것은 전혀 놀랄 일이 못된다.
고리쇠투구는 처음에 두 개의 반쪽 두개부가 중앙 물머리에 리벳 접합된 세 조각으
로 구성되었지만, 나중의 표본들은 이마 띠에서 나와 철모 정상으로 모아지는 철골
로된 늑재로 구성되었다. 이것들 사이에는 삼각형 철판이 있었는데, 이것에 때로는
청동이나 은이 도금되고 준보석으로 장식되기도 했다 (홀랜드 듀에른에서 출토된 4
세기 철모나, 유고슬라비아의 인테르히사(Inter□issa)와 베르카소포(Berkasovo)에
서 나온 표본들처럼). 이집트의 드 엘 메디네(De^r el Medi^neh)에서 출토된 5세기
철모같은 후기 로마 표본들은, 면갑부, 분리된 목 보호대와 아주 흔하게 코가림이
장비되어 있었는데, 코가림은 양식화된 눈썹과 하나가 되어 철모 앞에 리벳 접합 되
었다. 이 종류의 철모들은 6세기와 7세기에 유럽 전체에서 발견되었다; 일례로 프랑
크 왕족의 무덤에서 나온 뫼르켄(Mo"rken) 철모, 영국에서 발견된 서튼 후(Sutton H
oo) 철모는, 명백히 후기 로마 형태에서 기원되었고, 스칸디나비아의 웬델(Wendel)
철모는 거의 동일한 형태를 가진다. 면갑부와 목 보호대는 대략 7세기 후반이나 8세
기 초반에 버려지고, 이 종류의 철모는 그때부터 외관상 변화없이 13세기 후반부까
지 그대로 살아남았다.
팰러딘들은 몸에 사슬 비르니(mail birnie)나 하우벅(houberk), 비늘옷(scale shirt
)을 입었고, 보다 특이하게는, 적층 갑옷 외투 (coat of lamellar armour)를 입었다
. 후자의 표본이 스칸디나비아의 웬델족 무덤에서 발견되었고 황금 시편(Golden Psa
lter)에 묘사되어 있다. 서로 연결된 금속 고리로 형성된 사슬옷은, 켈트족 무덤에
서 처음 나타나고, 로마 저자인 바로는 그것의 발명을 켈트족에게 돌렸다. 그것은
고전 세계에서 BC 3세기에 처음 사용되고 널리 퍼지게 되었다. 카롤링거풍 사슬옷은
보통 무릎 길이나 그보다 조금 짧았고, 머리 위로 뒤집어 썼다. 그것은 앞가운데
틈새가 있는 단순한 둥근 목 테두리를 가졌고, 변함없이 짧은 소매를 가졌는데, 그
것은 때로 팔꿈치까지 이르렀다. 앞과 뒤 중앙은 착용자가 승마할 수 있도록 사타구
니 높이에서 갈라져있었다. 초기 사슬옷은 그 밑에 외양적으로 특별한 의복 없이,
보통의 모직 상의 위에 입었다. 805년 발효된 샤를마뉴의 칙령은 300에이커 이상의
땅을 소유한 자는 모두 사슬 비르니를 가질 것을 요구했다. 초기 기사들은 베고 찌
르도록 고안된 칼, 날이 넓은 창과 둥근 볼록 방패로 무장되었다.
이 일습은 유럽 전체에서 지배적인 것이었고, 비록 개개의 물품에 약간의 변동이 있
다고 해도, 거의 바뀌지 않고 11세기 말까지 계속되었다. 8세기 무용담 베오울프는
기트인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손으로 연결된 질긴 사슬 외투 하나하나가 반짝이고, 빛나는 작은 철고리가 갑옷 몸
통에 달려 챙그랑거렸다. 그들이 갑옷을 입고 그 회당에 도착했을 때, 그 바다에 단
련된 남자들은 그들의 넓은 이중 보강된 방패를 풀고 궁전 벽에 기대어 놓았다. 그
리고 그들이 의자에 앉자 그들의 갑옷 몸통이 울렸다. 그 뱃사람들의 무기인, 철제
날이 달린 회색 창들은, 깔끔하게 거치되었다. 그들은 잘 장비된 일행이었다.
그들의 지휘자인 베오울프는 철모를 썼고, 그는 최상의 금속으로 만들어진 고대 문
양이 있는 칼을 가졌으며, 그의 할아보지 흐레텔(Hrethel)을 위해 웨이랜드 대장장
이 (Wayland Smith) 그 자신이 만들어서 세계에서 가장 좋다고 그가 주장하는 사슬
갑옷을 입었다. 이 사슬은 나중에 그렌델의 괴물 어머니가 그녀의 손톱을 그 촘촘히
짜여진 연결 사이로 밀어넣지 못할 정도의 품질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AD 742년의 샤를마뉴의 등극은 유럽에서 전쟁에 근본적인 변화를 남겼다. 그는 징세
에 엄격한 기강을 강화하고 세출을 그의 기병 타격력을 증가시키는데 집중하여, 아
바르, 롬바르드, 사라센 기마인들에 의해 그의 제국에 행해지는 약탈에 대처하려 했
다. 그는 일련의 법들을 반포하여 토지 소유자가 방패, 마창, 칼과 비수를 장비한
기병을 유지하도록 했다. 875년 경 샤를 마뉴의 죽음으로부터 6년 후에, 성 갈의 승
려(Monk of St Gall)는 그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러자 철왕(Iron King)이 철
투구를 왕관으로 쓰고 철의 소매를 하고 그의 가슴은 사슬옷으로 보호하고 나타났다
... 그의 허벅지는 사슬로 덮였든데, 다른 사람들은 그 부위를 보호되지 않은 채 놔
두는 것을 좋아했다... 그와 그의 군대의 대다수의 다리는 철제 정강이받이로 보호
되었다.' 그는 또한 평범한 철 방패를 가지고 다녔다고 말해진다. 시적 파격의 정도
를 감안해도, 이것은 보다 잘 장비된 기병이 입는 것에 대한 상당한 암시를 준다.
8세기와 9세기에 걸쳐 카롤링거의 라인 지방에서 생산된 장검은 비잔틴인과 사라센
들에게 특별히 가치있게 여겨졌다. 무거운 찌르는 창이 같은 시기에 개발되었는데
그것은 너무 깊이 꿰뚫지 못하도록 기저부에 곁가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흔히
양 손으로 사용되는 것으로 그려져 있고, 등자가 안장 앞꼬리와 뒷꼬리가 보다 튀어
나온 새로운 형태의 안장과 함께 도입되어, 말의 중량과 속력을 마창 찌르기에 더해
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곁가지가 필요했을 것이다. 확실히 등자는 기수에게 아랫
쪽으로 보다 강한 칼질을 하게 해주고 거친 땅과 백병전에서 보다 안정성을 주었다.
등자는 중국에서 5세기의 어느 때에 발명된 것으로 보이고 7세기에 아랍인들과 싸
울 때 사용된 것이 처음으로 기록되어있다. 그것들은 8세기 초에 서방에 전파되었는
데, 아마도 아바르와 롬바르드 참입자에 의해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10세기의 기사의 장비는 또한 바이킹에 의해 영향받았다. 그들은 사슬옷이나 적층
갑옷과 철모를 입었고, 평평한 둥근 방패를 가지고 다녔다. 그들의 주무기는 칼, 도
끼와 창이었다. 나잘(Njal)의 무용담은 어떻게 스카페딘(Skarphedin)의 도끼가 홀그
림(Hallgrim)의 허벅지를 자르고, 군나르(Gunnar)의 것이 토르켈(Torkell)의 목을
잘랐는지 말해준다. 바이킹은 재산과 명성을 그들의 무기 탓으로 돌렸고, 이 시기의
칼에 대한 거의 종교적인 숭배는 바이킹의 영향의 결과일 수도 있다. 아마도 문양
이 들어간 칼을 만드는데 필요한 시간, 노력, 그리고 돈이 그것에 이런 위치를 부여
했을 것이다.
스칸디나비아와 프랑크 군대 양쪽의 사병은, 대부분, 방패와 창만을 장비했다; 그러
나, 양쪽 다 활을 사용했고 프랑크족은 원시적인 형태의 십자궁과 투석기를 발사 무
기로 사용했다. 전투에서 활의 중요성은 베오울프의 화장에서 위글라프의 장례 연설
에 의해 입증되어 있는데 거기서 그는 색슨 전사들이 방패 벽 뒤에서 싸우는 감명깊
은 장면을 그린다.
이제 검은 불꽃을 쏘아올려, 활시위에 의해 가속된 화살의 질풍이 몸을 숨긴 방패들
위로 떨어지고 깃털로 날아가는 막대가 그 임무를 다하여 화살촉을을 목표로 유도
하는 강철의 비를 그렇게 자주 직면한 투사들의 왕자를 화염이 삼키게 하라.
바이킹의 약탈과 정복 전쟁은 그들의 무기와 공격적인 전쟁 양식을 북서 유럽 전체
에 퍼뜨렸고 이것이, 프랑크 제국 본래의 전통과 연합하여, 노르망디, 영국, 시칠리
아 뿐만 아니라 명성있는 바랑 시위대(Varangian Guard)까지 정복한 군대를 만들어
내게 되었다. 후자는 비잔티움의 황제의 근위대로서 노르웨이의 왕 하랄드 하르드라
다(Harald Hardrada) 자신과 같은 인물이 근속하던 것이었다.
10세기가 되면 중세 기사의 주요 특성들이 나타났다. 그는 지위와 권위를 가진 기마
전사였고 다른이에 대한 그의 위치와 관계는 명확히 정해졌다. 그가 보다 높은 사
회적 지위에 있는 자들에게 짊어져야 하는 의무와 복종은 장원 제도에 의해 끊임없
이 반복되어, 그의 하위자들은 그에게 의무와 복종이 부과되었다; 그리고 그의 무력
과 용맹에 의해 그는 귀족 지위로 오를 수 있었다. 그의 사회적인 위신은 모든 귀족
들이, 그들의 지위와 상관없이, 기사였다는 점에 의해 더욱 향상되었고, 기사들의
무장은 귀족 계급이 독점하게 되었다.
한 기사의 다른이들에대한 행동에 필요한 제한은 일찌기 형식화되어 기사도의 계율
이 되었다. 이것은 기사 지위에 있는 자들의 그들과 필적하는 사람들에 대한 행실을
지배했지만, 약자에 대한 자비와 빈자에 대한 자선에 대한 종교적인 명령을 제외하
고는, 다른 계급에까지 연장되지 않았다.
최초에 기사작위는 다른 기사에 의해 부여될 수 있었지만, 점차로, 이것은 군주만의
특권이 되었고 점점 종교적인 의식으로 승화되었다. 기사 없이는 지배자는 그의 의
지를 관철시킬 수 없었다. 기사의 지위, 신분, 부는 그의 영지의 크기에 달려 있었
다. 서유럽의 왕국 안에서 땅이 점점 드물어지자, 기사가 부와 지위를 더 획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결혼에 의해서이거나 용병이나 프리랜스로 고용되는 것 뿐이었
다 - 노르망디공 윌리엄이 영국을 정복한 군대를 키울 수 있었던 것은 용병 뿐만 아
니라 그 자신의 가신들에게 영지에대해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Dancing Dragon, The Rain Dropper